진짜 내공은 어려울 때 드러나는 법인데, 나는 삶이 좀 어렵다고 이 모양이다. 성경공부는 모임을 해야하니 어쩔 수 없이 해 가고 있지만, 책 읽는 양은 눈에 띠게 줄었다. 시간은 더 많은 듯 한데도 말이다. 나를 채찍질하는 차원에서 '책읽는 이야기'를 계속하려고 한다.

지난 달에는 4권의 책을 읽었다. 쉽고 얇은 책들만 읽었다는 사실을 쉽게 알 수 있을 것이다.

1. "즐거운 망명자", James Houston, IVP
2. "Finally Alive", John Piper, DesiringGod
3. "바울이 분석한 사탄과 악한 영들", Clinton E. Arnold, 이레서원
4. "복음주의자의 불편한 양심", Carl Henry, IVP

우선 제임스 휴스턴이 자신의 인생을 돌아보며 후배들에게 하고픈 말들을 정리했다는 '즐거운 망명자'이다. 음... 최근의 저작 중에 '망명자'라는 단어를 심심치 않게 볼 수 있다는 사실이 눈에 띠었다. '망명자'는, 기존의 조직교회의 한계를 인식하고, 그 조직을 떠나 새로운 곳을 찾아 길을 떠난 사람들을 지시한다. 이 단어는 예전에 마이크 프로스트의 '위험한 교회'에서도 동일한 의미로 쓰였던 기억이 난다. 개인적으로 이 단어가 얼마나 좋은지 모르겠다. 더구나 복음주의의 대학자인 제임스 휴스턴이 이 단어를 사용했다는 점만으로도 참으로 힘이 되었다. 하지만, 책 내용에서는 '변증법'의 정의를 헤겔의 그것이 아니라, '죄인인 우리가 자기중심적인 삶을 끊임없이 부정하며 살아가면서 윤리의 영역에 실제로 그 모습을 드러내는 변증법'이라고 사용한 것이 특이하다. 전반적으로 동의하면서 읽을 수 있는 무난한 책이었다.

두번째 읽은 책은,  John Piper의 'Finally Alive'이다. '칭의론'에 관한 주제를 빼고는 오랜만에 읽는 파이퍼의 책었다. '거듭남'은 무엇인지, 어떻게 거듭날 수 있는지, 그리고 참으로 거듭난 사람들에게는 어떤 일이 벌어지는 지를 잘 정리했다. 하지만, 내가 이미 존 파이퍼와 톰 라이트의 칭의론 논쟁에 너무 깊이 빠져 있어서 그런지 몰라도, 파이퍼의 주장이 그리 순수하게만 들리지는 않았다. '거듭남'을 이야기하면서, 기존의 '칭의론'을 옹호하려는 의도가 너무 짙다고 느껴지니 말이다. 몇 년 후에 다시 읽어보면 어떨지 모르겠지만, 이번에 읽으면서 받은 느낌은, 존 파이퍼가 '칭의론' 논쟁으로 인해 논지가 너무 방어적이 되는 것이 아닌가하는 것이었다.

세번째 읽은 책은, 개혁주의 신학자 Clinton Arnold의 'Powers of Darkness'였다. 최근 몇년 동안 '악'이니 '사탄'이니 하는 주제가 공공연하게 다루어지고 있다는 점은 참 고무적이다. 그런 흐름 속에서 Arnold는 바울 서신에 나타난 많은 논제들이 당시의 영적인 실체에 대한 생각들을 반영하고 있슴을 설명한다. 그리고 이 영적 세력은 가상이 아닌 실제이고, 그에 대해 우리가 어떻게 대항해야 하는가를 바울 서신을 통해 이야기한다. 특징적인 것은, '사탄의 가면을 벗겨라', '사탄의 체제와 예수의 비폭력' 등의 저자인 월터 핑크의 주장에 이의를 제기한다는 점이다. 아놀드에 의하면, 월터 핑크의 '사탄'에 대한 생각은 대부분 칼 융의 사상에 기초한 것이고, 그래서 '사탄'을 실체라기 보다는 '조직' '시스템' 등 인간이 인식하는 어떤 것(그림자)이라고 주장한다고 한다.  하지만, 나는 월터 핑크의 생각이 정말 그러한가에 대해서는 의문이 든다. 내가 이해한 바에 의하면, 분명 월터 핑크가 융의 심리학에 빚지고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탄'을 실체로 이해하고, 구원받아야 할 대상으로 인식한다는 점이다. 월터 핑크의 그런 점을 Marva Dawn도 자신의 책 '세상권세와 하나님의 교회'에서 인정하지 않았던가 말이다. 내가 잘못 이해한 것인지, 아니면 아놀드가 오해한 것인지. 그래서 '사탄의 가면을 벗겨라'를 다시 들어 읽기 시작했다.

네번째 책은, 20세기 고전 중의 하나인 '복음주의자의 불편한 양심'이다. 1947년 Fuller 신학교를 시작하면서, 복음주의의 정체성에 대해 선언했다는 평을 받는 이 책은, 사회적 책임에 무관심한 근본주의자들에게 경고를 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선배 복음주의자들이 어떤 고민을 해 왔고, 또 현대 한국의 복음주의가 어떤 위치에 있는지 살펴볼 수 있게하는 책이다. 

늘 그렇지만, 책을 읽으면 고민이 늘고, 또 읽어야 할 책이 는다. 생각의 지평을 넓혀주는 책을 만나는 일은 정말 기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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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stigma
매주 금요일에 우리집에는 아이들의 떠드는 소리가 늘 가득하다. 신생아의 울음소리부터 10살 넘은 아이들이 각종 게임을 하는 소리까지 어울려서, 처음 방문하는 사람들의 혼을 빼놓기에 충분한 소음을 만들어 낸다. 그러고보니, 금요모임을 우리집에서 시작한지 벌써 10년이 되어간다. 둘째 현서가 1살이 안되었을 때부터 시작한 모임이니까. 이젠 이 소음이 배경음악처럼 들리는 걸보면, 사람은 쉽게 익숙해지기 마련인가 보다.

지난 주에도 7~8가정이 모여서 치열하게 성경공부를 했다. 본문은 누가복음 22장 24~38절까지였다. 물론 처음 계획은 53절까지였지만, 늘 그렇듯이 계획은 계획으로 그치고 말았다. 누가복음을 시작한지도 어언 2년이 넘었건만, 아직도 이렇고 있는 걸 보면, 난 진도 뽑는데는 영 자질이 없나보다. 

성경공부에 뭐 특별한 것이 있을까? 그래도 아이들 키우는 엄마 아빠들이 시간을 쪼개서 함께 논의한 내용들이 귀해서 그것을 간략하게 정리하고픈 충동이 너무도 강해서, 오랜만에 블로그에 접속해 본다.

지지난 주 공부한 내용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눅 22:24~29절의 내용을 나누었는데 그 내용은, 최후의 만찬이 끝나자 제자들은 '누가 더 크냐'는 논쟁을 하고 있었고, 그에 대해 예수님께서 대답하시는 이야기이다. 예수님은 자신이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러 왔다고 하시고, '너희는 내가시련을 겪는 동안에 나와 함께 한 사람들이다. 내 아버지께서 내게 왕권을 주신 것과 같이, 나도 너희에게 왕권을 준다.'고 하신다. '섬겨야 한다'와 '왕권을 준다'의 이야기가 어떻게 한 이야기 가운데 나타날 수 있을까? '왕권'은 다스림이고 '섬김'은 왕권의 반대인 종의 모습 아니던가? 하지만, 이 이야기 속에서 우리는 십자가 신학을 발견할 수 있었다. 다시 말해, 예수님은 분명 승리자로 오셨고, 그런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에 연합한 우리 또한 승리하고 다스리는 통치자가 된다. 하지만 그런 승리가 가이사의 논리인 무력과 전쟁을 통해 이루어지지 않고, 지금은 무기력해 보이는 십자가를 통해서 이루어진다는 사실을 예수님은 뼛속까지 인지하고 계셨다는 점을 발견할 수 있었다. 그러니, 최후의 만찬 후에 '누가 더 크냐'는 다툼 중에 있는 제자들에게 '섬김'과 '왕권'을 아무런 주저함 없이 하나의 통합된 이야기로 말씀하실 수 있었을터이다.

"(31)"시몬아시몬아보아라사탄이 밀처럼 너희를 체질하려고 너희를 손아귀에 넣기를 요구하였다. (32)그러나 나는 네 믿음이 꺾이지 않도록너를 위하여 기도하였다네가 다시 돌아올 때에는네 형제를 굳세게 하여라." (33)베드로가 예수께 말하였다. "주님나는 감옥에도죽는 자리에도주님과 함께 갈 각오가 되어 있습니다." (34)그러나 예수께서 말씀하셨다. "베드로야내가 네게 말한다오늘 닭이 울기 전에네가 세 번 나를 모른다고 할 것이다." (35)예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내가 너희를 돈주머니와 자루와 신발이 없이 내보냈을 때에너희에게 부족한 것이 있더냐?" 그들이 대답하였다. "없었습니다." (36)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이제는 돈주머니가 있는 사람은 그것을 챙겨라또 자루도 그렇게 하여라그리고 칼이 없는 사람은옷을 팔아서 칼을 사라. (37)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그는 무법자들과 한 패로 몰렸다'고 하는 이 성경 말씀이내게서 반드시 이루어져야 한다과연,나에 관하여 기록한 일은 이루어지고 있다." (38)제자들이 예수께 말하였다. "주님보십시오여기에 칼 두 자루가 있습니다."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시기를 "넉넉하다하셨다."

이번 주 본문은,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세번 부인할 것을 경고하시는 장면이다. 이 익숙한 본문에서 집중했던 질문은 크게 두가지였다.

첫째, 만일 베드로가 깨어서 기도했다면 예수님을 세번 부인하는 일이 일어나지 않을 수 있었을까하는 질문이다. 뭐 그랬을 수도 있지만, 만일 그랬다면 예수님의 경고는 뭐가 되는 걸까? '베드로야. 깨어서 기도해라 그렇지 않으면 네가 날 세번이나 부인할 지도 모른다'는 사전 경고도 아니고, '네가 세번 나를 모른다고 할 것이다'라는 꼼짝할 수 없는 단언이니 말이다. 예수님의 말씀이 베드로에게 '세번 부인하지 않으려면 기도해라'라는 의도였고, 베드로가 정말 기도하면서 예수님을 부인하지 않았다면 예수님께서 하실 수 있는 말씀이라곤 '아님 말고' 정도 아니었을까. 

그럼 왜 이런 말씀을 하셨을까? 큰 그림 속에서 본문을 살펴보았다. 예수님은 최후의 만찬 중의 대화를 통해, 가룟 유다가 자신을 팔 것임을 잘 알고 계심에도 불구하고 그 길을 자발적으로 가신다는 사실을 말씀하셨다. 그리고 31절에 보면 '사탄이 밀처럼 너희를 체질하려고 너희를 손아귀에 넣기를 요구하였다'고 하심으로써 현재 사탄과의 전쟁 중에 있다고 말씀하셨다. 또한 53절에 보면, '그러나 지금은 너희의 때요, 어둠의 권세가 판을 치는 때다'라고 하심으로써, 지금은 이 사탄과의 전쟁에서 고의적으로 '패배' 모드 가운데 있슴 또한 암시하신다. 이렇게 앞뒤 구절을 미루어 볼 때, 지금의 정황은 이렇다 - 예수님과 사탄과의 영적인 전쟁이 벌어지고 있고, 지금은 사탄이 이기는 것처럼 보이는 상황이다. 아직까지는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보호하셨지만, 지금은 사탄이 승리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래서 옷을 팔아 칼을 사야할 만큼 제자들이 자기 자신을 보호해야 하는 시기인 것이다. 또한 제자들을 대표하는 베드로도예수님을 부인하게 되는 지경에 이르게 될 것이다. 그것도 세번씩이나 말이다. 하지만, 이런 패배가 예수님의 무력함 때문이 아니라는 점을 분명히 하신다. 가룟 유다가 배반하는 것을 미리 아셨지만 그대로 놔두실 뿐 아니라, 베드로의 실패 또한 미리 알고 계신다. 이런 패배 조차도 예수님의 주권 가운데 있다는 말이다. 베드로가 자신의 목숨을 바쳐서라도 함께 하겠다고 장담하던 예수님을 부인했을 때 그 절망감은 어떠했을까? '아~~ 정말 싸움에서 졌구나'하는 패배감에 시달리지 않았을까? 하지만,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이렇게 말씀하고 계시다. '그래 지금은 패배하지만 이것이 끝이 아니란다. 나는 이 패배 조차도 미리 알고 있었단다. 그러니 실망하지 말아라. 이제 곧 승리하게 될꺼란다'라고 ...

난 개인적으로 '겨자씨 비유'와 '누룩 비유'를 참 좋아한다. '하나님나라는 마치 겨자씨나 누룩 같아서, 지금은 아무런 결실도 맺지 못하는 것처럼 실망하게 될 것이다. 하지만 좌절하지 마라. 하나님나라는 원래 이런 모습이란다. 지금은 아무런 결과가 없어 보이지만, 결국에는 큰 결실을 이루게 된단다. 지금 아무 것도 없어서 좌절되는 모습까지도 난 알고 있단다.' - 이 얼마나 위로가 되는 말씀인지 모르겠다. 아마 베드로는 자신이 세번 예수님을 부인하는 경험을 하면서 '겨자씨 비유'를 직접 몸으로 체득할 수 있지 않았을까 싶다.

둘째, 제자들이 왜 칼 두자루를 가지고 있었을까하는 질문이다. 이 이야기의 해석은 '정당 전쟁론'이냐 아니면 '평화주의'냐에 따라 상당히 다를 것이다. '정당 전쟁론'을 지지하는 사람들은, 예수님과 제자들도 방어를 위해서는 칼을 소유했고, 그러므로 우리도 방어를 위한 전쟁은 정당하다고 할 것이다. 반면, 평화주의자들은, 그 칼은 예수님의 의도와는 관계없이 열심당원인 제자들이 소유한 것이고, 예수님께서는 그 칼의 사용을 막으셨다고 할 것이다. 

그 칼의 출처에 큰 관계없이, 예수님은 자신이 체포되는 결정적인 순간에도 칼을 사용하지 않으셨다는 점이 중요하다. 사탄과의 전쟁 가운데, 현재 패배하는 모드에 있슴에도 불구하고, 어떤 경우에도 칼을 사용하지 않으셨고, 차라리 적극적으로 십자가를 지심으로써 궁극적인 승리를 이루셨다. 이것이 예수님께서 승리를 이루시는 방법이었다.

만일 이 구절에서 '예수님도 자신의 방어를 위해 칼을 소유하고 계셨다'는 결론을 이끌어 낸다면, 어쩌면 지금도 예수님은 우리에게 '넉넉하다'고 하지 않으실까 싶다. 두자루의 칼이 충분히 많다라기 보다는, '너희의 어리석음이 이젠 충분하다'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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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stigma
http://journeywithyou.tistory.com/entry/교회에-대하여

이정희 형제의 '교회에 대하여'를 감사한 마음으로 읽었다. 그 글에 대한 필자의 짧은 생각을 나누기 원한다. 그리고 기회가 된다면 이 부분에 더 활발하고 전문적인 이야기들이 오고가면 좋겠다.

필자가 본 정희 형제의 논점은 다음과 같다.
<기존의 교회의 문제점에 반발로 생기게 된 사적 공동체들은 기성교회를 무시하고 자신들만이 진정한 교회라고 자처한다. 또한, 예수님과 제자들의 관계에 기초한 교회를 생각할 때, 보편성은 교회의 핵심적인 가치임으로 그 성향에 거스르는 사조직과 같은 모임은 교회로 볼 수 없고, 또한 해체되어야 한다.>
 
우선, 이 글의 전제가 된 소위 '사적 공동체의 우월의식'에 대해 짚고 가야 할 것 같다. 우리는 현재의 기성교회를 어떻게 정의할 수 있나? 또 사적으로 모인 공동체와는 무엇이 어떻게 다른가? 현대의 조직교회(1)란 신학교라는 세상의 학제를 따른 교육시스템을 거친 어떤 한 사람이 특정한 모임의 리더가 되고, 그 사람을 중심으로 모인 일단의 사람들을 조직으로 구성하고 운영하는 모임. 또한 이런 모임을 위해 공간과 예산을 확보하고, 정기적인 회합을 '예배', '기도모임' 등으로 가지는 기관이라 하겠다. 이런 조직교회의 문제 중의 하나는 교회의 리더가 되는 사람의 자격이다. 조직교회는 신학교라는 학제를 거친 사람에게 '목회자'라는 지위를 주고, 그에게 리더십을 부여한다. 물론 신학교에 가서 전문적으로 성경을 연구하고 공부하는 것을 나쁘다고 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어떤 사람이라도 성경을 좀더 체계적으로 공부하고 배우고 싶다면 신학교를 통해 교육받을 수 있고 또한 교회의 리더가 될 수 있다. 문제는 작금의 상황처럼 세상 체제 하에 있는 신학교에서 교육받은 사람"만"이 교회의 지도자가 될 수 있고, 그렇지 않은 사람이 중심이 되어 모인 모임을 교회가 아니 것으로 취급한다는 점이다.
 
성경에는 목회자의 자질이 명시되어 있다. 그 자질은 '가르치는 은사'이다. 예전에 이와 비슷한 논쟁이 있을 때, 지금은 고인이 되신 김인수 장로님의 글이 읽은 적이 있다. '어떤 경우에도 신학교가 은사를 대치할 수 없다'고 하신 말씀이다. 그렇다. 신학교라는 교육체제를 거친다고 성경에서 명시된 은사를 가지게 되지 못한다. 물론 신학교를 나온다고 해서 가지고 있던 은사가 없어져서 리더의 자격이 사라지는 것도 아니다. 이렇듯 신학교라는 교육체제는 은사를 가진 리더를 더 자질있는 사람으로 훈련시키는 도구는 될 수 있지만, 이 교육기관에서의 교육 그 자체가 그에게 리더의 자격을 부여하는 권한을 가질 수는 없다.
 
사실 이런 교육시스템을 통한 리더십의 구성은 성경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다. 그도 그럴 것이 교회사를 조금만 살펴보아도, 초대교회에는 각 모임에서 리더로 인정받는 사람들에 대해 사도들이 각 교회를 다니며 인준하는 형식을 띠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다가 2세기 경에,  당대의 유명한 수사학자들이 예수님을 믿게 되었고, 그들은  자신이 익숙한 방법을 동원해 제자들을 양육하기 시작하는데, 그것이 신학교의 모체를 이루게 된다. 그 후 콘스탄틴누스의 로마 국교화 이후에 급작스럽게 교인의 수가 증가하게 되었는데, 그들을 감당할 리더들을 효과적으로 키워낼 방편으로 조직적 교육기관을 설립하게 된 것이다.
 
정리하자면, 신학교의 졸업여부가 교회의 리더십의 자격 요건이 될 수는 없다. 그런데도, 조직교회의 리더들은 자신들이 신학교를 나왔다는 이유만으로 스스로 권위를 부어하고, 조직교회 밖에서 비록 신학교를 졸업하지 않았지만 '은사'를 가지고 공동체를 섬기고 가르치는 사람들을 '정통성 부재' 등등 운운하며 무시하고, 심지어는 자신들의 사도성까지 들먹이기도 한다. 이런 비성경적인 흐름에 대항하여, 신학교를 나오지는 않았지만 은사를 가진 사람들이 섬기는 공동체가 스스로의 교회의 정체성을 확보하기 위한 몸부림이 때로는 우월적인 모습으로 비춰졌을 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지금의 시점에서 우리가 넘어야 할 산은 기성교회를 무시하는 사적인 공동체의 우월성이라기 보다는, 신학교라는 어디에 근거가 있는지도 잘 모르겠는 교육시스템을 거쳤다는 이유로, 은사를 가지고 공동체를 섬기는 리더들을 무시하고 인정하지 않는 조직교회가 아닐까 싶다.
 
또 한가지, '처음부터 특정한 목적을 갖고 특정한 자격을 가진 사람들만이 가입할 수 있는 공동체는 교회인가'라는 문제에 대해 이야기해 보자. '다양한 차이를 가진 사람들이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가 되어 문화적 차이를 극복하고 하나가 된다는 것이 성경에서 말하는 교회의 정의이자 성격'이라고 할 수 있겠지만, 어디까지가 다양성이고 어디까지가 보편성인가하는 문제는 그리 쉽게 정리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정희형제가 교회의 보편성의 예로 든 제자들의 문화적 다양성은 일면 맞는 면이 있지만, 일면 틀린 점도 있다. 예를 들어, 예수님의 제자 공동체가 "유대인" "청년" "남자"들로 구성되었기 때문에 보편성을 가지지 못한다고 할 수도 있다. 반면, 청년 학생들로 구성된 선교단체들의 경우, 그 구성인원의 성장배경과 경제능력, 성별, 전공별의 차이를 생각한다면 다양성이 없다고 말할 수도 없다. 결국 어떤 교회도 나름대로의 다양성과 보편성을 지니게 마련이고, 그런 특성을 인정만 할 수도 비난만 할 수도 없는 노릇이다.

'모든 기독교 공동체는 에큐메니컬, 그리스도 안에서의 하나됨을 핵심가치를 갖고 있어야 한다'. 그렇기에 신학교 출신의 목회자에 의해서 조직되지 않았지만, 자신이 섬길 수 있는 사람들을 최선을 다해 섬기고 있는 공동체를 교회로 인정하고 받아 주어야 한다. 물론 그런 '사적인 공동체'도, 부패했다고 생각되는 기성교회이지만, 그들을 하나님의 교회 (The Church)의 일부로 인정하고 함께 가야 한다. 그렇게 조직교회와는 다른 모습이지만, 자신의 공동체를 섬기는 모임들이 '해체'되지 않고 더욱 건설적으로 세워져 갈 때, 진정한 의미의 교회는 더욱 건강해 질 수 있으리라 믿는다. 그런 모임도 교회 (The Church)의 다양성의 한 부분일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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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정희형제가 사용한 기성교회라는 단어를 표현의 명확성을 위해 조직교회라는 단어로 대치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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